신비로운 미소, 그리고 사라진 눈썹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입니다.
이 작품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커다란 진주 귀걸이와 촉촉한 입술이 아닐까요?
그녀는 전통적인 초상화와 달리 어딘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의 걸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베르메르는 의도적으로 눈썹을 그리지 않았던 걸까요? 아니면 후대의 복원 과정에서 사라진 것일까요?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극적인 아름다움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빛의 사용입니다.
베르메르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는 인물의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명암법(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소녀의 얼굴은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마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한 진주 귀걸이와 촉촉한 입술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배경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는 것이 바로 베르메르 작품의 특징이지요.
그녀는 누구일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이 그림 속 소녀는 누구일까요?
그녀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첫 번째 가설: 베르메르의 첫째 딸 마리아일 가능성
두 번째 가설: 베르메르를 후원했던 부유한 가문의 딸
세 번째 가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베르메르의 하녀 누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화가는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했고, 애정을 담아 그렸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에는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선 깊은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델프트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이 작품을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는 네덜란드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베르메르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자, 네덜란드 황금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지만, 그의 작품은 생전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품 거래인으로도 활동했기에, 남긴 작품 수가 많지 않습니다.
짧은 생을 살면서 겨우 40점도 채 안 되는 작품을 남겼지요.
잊힌 화가,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명성
1675년, 베르메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가족은 큰 빚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그의 작품들은 하나둘씩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잊혀 갔습니다.
그러나 1800년대 중반, 독일의 미술학자들이 베르메르의 작품을 재발견하면서 그의 명성은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지요.
다시 태어난 걸작, 복원의 과정
이 작품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19세기에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림은 색이 누렇게 변하고 물감이 많이 벗겨진 상태였습니다.
그 후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에 기증되었고,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특히, 눈썹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원래부터 없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가늘게 그려져 있던 것이 벗겨진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행히, 그녀의 머리를 감싸는 푸른색 두건(터번)은 잘 복원되어, 당시의 색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푸른 두건의 비밀, 울트라마린 블루
소녀가 쓰고 있는 푸른 두건이 유독 눈길을 끌지 않나요?
지금은 파란색이 흔한 색상이지만, 17세기에는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가 금보다도 더 비싼 물감이었습니다.
이 색을 얻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채굴한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라는 보석을 가루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귀한 색을 사용했다는 것은, 베르메르가 이 그림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로크 시대에는 파란 옷을 입은 인물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푸른 망토가 그러하지요.
어쩌면 베르메르는 이 작품을 통해 한 명의 소녀를 성스럽고 신비로운 존재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닙니다.
3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의 미소, 빛과 어둠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 덕분일 것입니다.
그녀는 누구일까요?
왜 이토록 우리를 사로잡을까요?
어쩌면 베르메르는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이 소녀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해석을 찾도록 유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겠지요.
감상포인트
등진 채 앉아 있다가 누군가 들어서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듯한 그녀. 귀에 달린 진주를 눈에도 달 고 있는 듯 금방 눈물방울을 떨어 뜨릴 것 같은 눈. 그런데도 너무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아 보이는 표 정. 세상사의 수선스러움을 모두 삼켜버린 이 고요한 그림 앞에서 는 그 어떤 들뜸도 금지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년)가 <모나리자>에서 그랬던 것 처럼, 얼굴 피부와 이어지는 눈, 코, 입의 윤곽선을 살짝 희미하게 그려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한 이 그림은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가가 살았던 네덜란드 델프트에 서 유행한 청화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 특유의 차분한 노란색, 입술을 찍어 누른 붉은색, 이 세 가지 색에 하얀색과 검은색만 덧붙인 담백하고 정갈한 초상화는 사실 모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페르메이르(1632~1675년)의 아 이 중 하나이거나 집안일을 도와주는 하녀를 모델로 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한 데, 후자의 경우를 두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영화와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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