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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아메리칸 고딕 - 그랜트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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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에서의 어린 시절

 

그랜트 우드는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이곳은 끝없이 넓은 옥수수밭과 밀 농장이 펼쳐진 곳으로,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평온한 시골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우드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미술적 재능

 

우드는 어린 나이에 이미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주로 자신이 살아가는 시골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곤 했습니다.

특히 14세 때는 미국 크레용 회사 크레욜라가 주관하는 미술 대회에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가능성이 일찍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기 위한 노력과 유럽 여행

 

우드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1922년부터 6년 동안 유럽을 네 차례나 방문하며 다양한 예술 사조를 접하게 됩니다.

 

특히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이 그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미국의 풍경을 그리다

 

유럽에서의 배움을 마친 후, 우드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유행하던 추상 미술을 거부하고, 다시 미국의 풍경과 고향 사람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그는 자신의 대표작을 탄생시킬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대표작, 《아메리칸 고딕》의 탄생

 

1930년, 우드는 미술 대전에 출품하기 위해 새로운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이웃집을 배경으로 하여, 동네 치과 의사였던 맥키비 박사와 자신의 여동생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여동생에게는 할머니의 헤어스타일과 어머니의 옷을 입히고 브로치를 채워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었으며, 맥키비 박사는 삼지창을 들고 있는 농부의 모습으로 세웠습니다.

두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려졌고, 보는 이들에게 관계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논란과 조롱을 받다

 

완성된 작품 《아메리칸 고딕》은 시카고 미술관에 전시되었지만, 초반에는 냉담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언론에서는 촌스러운 인물을 캐리커처처럼 묘사했다며 조롱을 퍼부었고, 아이오와 주민들마저 자신들을 모욕한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심지어 우드를 협박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세계 경제 대공황 속에서 재평가되다

 

그러나 곧 세계 경제 대공황이 터지면서, 미국은 극심한 불황 속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아메리칸 고딕》은 미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농촌의 소박한 삶을 묘사한 이 작품은 미국의 본래 정신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재평가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걸작이 되다

 

한 신문에서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들처럼 강한 심장과 단단한 턱을 가진 남녀 일꾼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헤드라인을 내걸며 이 작품을 조명했습니다.

이후 《아메리칸 고딕》은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와 함께 가장 많은 패러디가 만들어진 작품이 되었습니다.

 

감상

 

그랜트 우드는 자신의 고향과 미국의 전통을 작품 속에 담아낸 화가였습니다.

처음에는 조롱받았던 그의 작품이 시간이 지나며 미국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의 예술이 단순한 그림을 넘어선 의미를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메리칸 고딕》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미국의 정신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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